같은 소재로 손익분기점을 넘은 영화 '귀향'과의 차별성과 수익성, 생존하는 39명의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기를 포함한 각종 역사 고증, 그리고 국민 정서와 예술성의 밸런스 등 고민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나정 감독은 첫 장편영화 연출작으로 쉽지 않은 선택을 했습니다. 다만, 작년 2부작으로 방영된 동명의 TV 드라마를 재편집해 영화화했기 때문에 미리 시청자의 피드백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안도감을 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눈길'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눈길'의 언론 시사회 관람이 끝나고 여러 관람객이 받은 공통된 느낌은 '생각보다 성폭력 수위가 높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돋보이는 점이기도 합니다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의 과거와 현재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 냄으로써 관객이 사유할 공간을 넓혔다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젊은 관객층에는 눈길에서 보여준 소녀들의 일상만으로도 충분히 신선하고 강렬하게 비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가 먼 과거의 역사로 인식될 수 있고 또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 등에 관한 정보 접근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 박사와 역사학자들은 '삶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계속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일상은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역사의 결말뿐만이 아니라 소녀들이 겪었던 일상과 현실에서의 웃음과 눈물 모두를 들여다봐야만 이 사건의 진정한 비극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현세대와 비극적 역사가 절단면 없이 이어짐으로써 단순히 일본 정부를 향한 분노로 끝나지 않고, 피해자 할머니들이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정한 아픔과 희망이 은막에 투영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눈길' [엣나인필름 제공]
이야기는 눈 덮인 흰 자작나무 설원을 소녀가 숨 가쁘게 달음질치며 시작됩니다. 1944년 일제강점기 말, 가난하지만 씩씩한 소녀 '종분'(김향기)과 부잣집 고명딸에 공부도 잘하는 '영애'(김새론)는 한마을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종분은 남아선호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홀어머니(장영남)를 도와 집안 살림을 꾸려가면서 남동생 '종길'을 틈틈이 돌봅니다. 그러면서 영애처럼 학교도 가고 싶고 예쁜 모직 코트도 입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꿉니다.
영애는 모범생이지만 아버지가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를 거부하면서 일본인 선생에게 가혹한 체벌을 당하게 됩니다. 일본에 근로정신대 대원으로 유학을 가면 상급학교에서 차별 없이 교육받을 수 있고 머물 집도 마련해 준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그만 다른 소녀 동기들과 함께 근로정신대에 자원합니다.
'눈길' [엣나인필름 제공]
한편, 종분은 어머니가 그릇을 팔러 먼 읍내로 출타한 동안 야밤에 들이닥친 일본군의 손에 납치돼 만주행 기차에 강제 탑승합니다. 종분은 영문도, 행선지도 모르고 끌려온 또래 소녀들로 가득한 기차 안에서 일본으로 유학 간 줄 알았던 영애를 만납니다. 영애는 자신은 근로정신대 대원으로 온 것이라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소리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일본군의 거친 발길질과 욕설뿐입니다.
이제는 같은 운명이 되어버린 종분과 영애는 만주의 위안부 수용소로 끌려가 끔찍한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종분은 고통스러운 일상에도 반드시 집에 돌아갈 거라 다짐하지만, 영애는 그런 동무를 비웃듯 끔찍한 현실을 끝내기 위해 위험한 결심을 합니다.
'눈길' [엣나인필름 제공]
통상 위안부 피해자 소재의 영화나 다큐멘터리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보고 싶은 영화' 보다는 '애국자라면 봐야 하는 영화'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공통으로 보여 준 끔찍하고 가혹한 장면들 때문일 듯합니다.
그러나 눈길은 영화 자체로 볼 만한 작품입니다. 위안부 희생자들이 회상한 평화로웠던 소녀의 '평범한 일상'과 지옥 같은 위안부 시설에서 서로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웠던 '역경의 일상'을 충분히 보여줌으로써 차별성과 함께 사실성을 부여했습니다.
영화 '귀향'에서 끌려간 소녀들은 구슬픈 '가시리잇고'를 부르며 슬픔을 나누지만, 눈길에서는 조선말을 쓰지 말라는 일본군 몰래 소녀들끼리 당시 유행가였던 이난영 선생의 '봄 아가씨'를 부르며 우정을 나누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또, 귀향에서는 수용소 안은 재난 영화 속 땅굴처럼 일괄적으로 어둡고 뿌연 느낌이지만, 눈길은 수용소 창살 사이로 낮과 밤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밤이 되면 등불을 든 소녀들이 간수의 눈을 피해 옆방에 숨어들어 동무가 된 다른 소녀들과 '어머니가 말아주는 물김치에 고춧가루를 타서 먹고 싶다'는 등 진솔한 수다를 떨기도 합니다.
'눈길' [엣나인필름 제공]
일상에 주목하다 보니 섬세하고 포근한 미장센이 돋보입니다. 40년대 소녀가 어머니와 솜틀에 솜을 틀던 장면, 놋그릇을 윤이 나게 닦던 장면, 짝사랑하는 남학생으로부터 동화책 '소공녀'를 받고 설레어하던 장면…. 위안부 피해자들이 말하는 과거의 소중한 일상생활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영화는 이제는 할머니가 된 생존 피해자들의 일상도 담담히 투영해 냈습니다. 전쟁 종료 후 생활고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이 과거에 얼마 안 되는 일본 정부의 보상금 500원을 받으러 보훈처에 가서도 부끄러워 망설이는 장면은 관객의 눈시울을 붉히게 합니다.
유공자의 후손임에도 솜틀과 바느질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나라 독립유공자 정책의 취약점도 드러납니다.
'눈길' [엣나인필름 제공]
과거의 회상과 현재를 넘나들면서 엿보이는 코믹 요소는 대부분 현재 부분에 배치했습니다. 불량 여학생이 피우던 담배를 낚아채 맛나게 피우는 피해자 할머니의 모습 등은 영화를 맛깔나게 하는 조미료입니다.
이렇게 따뜻하고 소녀스러운 일상에 잔인한 현실의 음영을 진하게 드리우는 연출법은 이나정 감독의 지난 2013년 연출작인 'KBS 드라마스페셜 연우의 여름'에서도 여실히 보입니다. 눈길처럼 시사적인 메시지가 강한 소재와 접목했을 때 더욱 두드러지는 그만의 독특한 색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감독의 다음 스크린작이 기대되는 이유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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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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