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그때 왜 그랬을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하기도 하지만, 곱씹어 보면 일종의 성장통과 같은 과정이 아닐까 싶다.
대학로 뮤지컬의 신흥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뮤지컬 '찌질의 역사'(연출 안재승)는 서툴고 쪼잔한 연애담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청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의 내용은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공연 리뷰] 이불킥 부르는 연애담…뮤지컬 '찌질의 역사' [통통TV]
'민기'의 영국 출국을 앞두고 대학 동기 4명이 재회했다. 대학 시절 4총사로 불리던 이들은 철없던 신입생 시절을 떠올리다가 민기의 첫사랑 이야기를 한다.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입학한 민기는 같은 과 동기인 '권설하'를 만나 짝사랑에 빠진다. 그는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지만, 거절을 당한다. 시련의 아픔도 잠시, 민기는 권설하와 이름이 같은 연상의 여인 '윤설하'를 만나 사랑을 한다. 하지만 윤설하는 찌질한 민기의 사랑에 지쳐간다.
민기는 여자친구 앞에서 권설하의 이야기를 하며 비교까지 한다. 심지어 은밀한 첫 관계 후 '몇 번이나 경험이 있었느냐'며 여자친구의 과거를 캐묻기도 한다. 민기의 찌질한 사랑은 극에 달하고 결국, 설하는 작별을 고한다. 이별의 상처는 새로운 만남으로 치유하라 했던가. 민기는 같은 과 후배인 '최대웅'을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평소 남자 같은 자신의 이름이 불만이었던 대웅이 개명하려 하자, 민기는 '최설하'라는 이름을 추천해 준다. 과연 민기는 새로운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까.
주인공 민기는 작품의 제목만큼이나 찌질하다. 그의 병적인 찌질함은 섬뜩한 광기에 사로 집힌 한편의 호러 영화를 연상케 할 정도다. 민기는 떠나는 설하를 잡기 위해 자신의 잘못을 빌다가도 낮은 목소리로 '너도 잘못한 거 알지?'하며 몰아세운다. 설하와의 첫날밤, 얇게 미소 띤 표정으로 남자 경험을 묻는 얼굴은 왠지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본 듯 소름이 돋는다. 비단 이뿐인가. 윤설하와의 이별 후 철이 들었나 싶던 그는 대웅에게도 실수를 반복한다. 대웅에게 옛 연인의 이름인 설하라는 이름을 지어줄 정도니 그의 찌질함을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쯤 하면 민기의 행동은 찌질함을 넘어서 폭력적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민기의 세 친구도 사연과 정도가 다를 뿐 사랑에 대한 찌질함은 매한가지다.
관객들은 이런 이들의 모습에 야유와 한숨을 토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미묘하게 다른 남녀 관객의 반응이다. 진저리를 치며 야유를 보내는 여성들에 반해 남성들은 웃음을 보이다가도 굳은 표정으로 무대를 응시한다.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 쓴 표정의 얼굴이다. 일부 여성은 민기를 보면서 함께 온 남성의 얼굴을 쏘아 보기도 한다. 이처럼 정곡을 찌르는 인물과 대사들은 날 것처럼 자극적이고 매력적이다. 관객들은 마치 막장 드라마에 빠져들듯 이들 이야기에 매료된다.
90년대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과 소품들은 작품을 즐기는 또 다른 재미다. 여기에 소극장 무대를 가득 채우는 3인조 밴드 '토끼굴'의 라이브 음악은 극의 감칠맛을 더한다. 네 개의 공간으로 나뉜 무대는 극의 빠른 전환과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다만 장편의 웹툰 소재를 2시간으로 압축하다 보니, 원작이 가진 여성 캐릭터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안재승 연출은 "사랑의 시작과 지속 그리고 끝에는 용기가 필요한데 '찌질함'은 결국 용기가 없을 때 나타난다"며 "작품은 용기가 없던 네 친구가 보여주는 온갖 '찌질함'의 종합선물세트"라고 설명했다.
가수 겸 배우인 박시환, 강영석, 송광일, 이휘종, 김히어라, 정재은 등이 출연하는 작품은 오는 8월 27일까지 대학로 DCF 대명문화공장 수현재씨어터에서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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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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