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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을 즐긴다'…한일 양국서 히트 친 노년의 위트 '실버센류'

'늙음을 즐긴다'…한일 양국서 히트 친 노년의 위트 '실버센류'

실버 센류 담당자와 실버 센류 단행본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어떤 얼굴이든 사기꾼으로 보이는 인터폰", "인공지능(AI)에 저승 가는 길 물어본다", "숙제를 손자에게 부탁받아 어둠의 알바", "동창회에 (졸업) 앨범 지참해서 얼굴 인증", "자기소개는 이름, 출신, 취미 그리고 지병" ('제23회 유노협 실버 센류' 공모전 입선작 중에서)

일본어 발음으로 따지면 대략 17음절의 문장에 압축적으로 묘사된 시니어 세대의 일상을 살펴보면 어느새 미소를 짓게 된다.

노년을 외롭거나 괴로운 것, 혹은 인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우울한 시기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위트 넘치는 문장을 음미하다 보면 고령자가 쌓아온 지혜와 연륜도 새롭게 느낄 수 있다.

도쿄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고령자

이들 작품은 일본의 공익사단법인 전국유료노인홈협회(유노협)가 작년 9월 발표한 '제23회 유노협 실버 센류'(이하 실버센류) 입선작이다. 유료노인홈은 고령자들이 체계적인 돌봄을 받으며 24시간 생활하는 일종의 요양시설이다.

'센류'(川柳)는 통상 5·5·7의 음수율을 지니는 일본 정형시로 각급 학교나 여러 단체가 콘테스트하는 등 일본인이 일상에서 비교적 가깝게 접하는 문학 장르의 하나다.

실버센류 역대 입선작 중 일부를 한국어로 번역한 단행본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포레스트북스)이 지난달 출간됐다. 교보문고가 집계한 2월 첫 주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종합 37위, 시 부문 1위에 오르는 등 국경을 넘어 공감을 얻고 있다.

일본에서는 실버센류 입선작을 소개한 단행본이 13권째 발행됐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는데 고양이가 왔다', '적어놓은 일정은 전부 진료받는 날', '스쾃은 쭈그린 채로 일어서지 못합니다', '저세상보다 가까운 것 같은 우주(여)행', '생일날 촛불 (끄려고) 불다가 현기증' 등 고령자가 일상에 느끼는 불편이나 좌절감마저 해학적으로 표현한 제목이 매력적이다.

실버 센류 입선작 모음집

실버 센류가 국경을 넘어 주목받는 것을 계기로 유노협에서 실버 센류를 담당하는 후쿠자와 마나미(福澤美·37) 사업부 계장과 같은 부서에 속한 이다 아야코(井田綾子·51) 씨를 화상회의 시스템 줌(Zoom)으로 만나 실버 센류 및 노년기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실버센류 공모는 유료노인홈 사업자와 입소자를 지원하는 단체인 유노협 설립 20주년 기념 홍보 행사의 하나로 2001년에 처음 실시됐는데 예상을 뛰어넘은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첫 공모 때는 24편을 선발했는데 응모작이 3천375편이었다. 제2회 공모 때는 응모작이 6천649편으로 거의 배증했고 3회 때는 1만편을 돌파하는 등 빠른 속도로 주목받았다.

후쿠자와 계장은 "고령자도 건강한 분들이 많고 활력과 상상력이 있으니 그분들이 세상을 향해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자리로 마련했다"며 "첫 공모가 매우 호평받아 2회 이후에도 공모를 계속하고 있다"고 경과를 설명했다.

그는 "늙는 것에 관해서 심각해지지 않고, 재밌게 웃어넘길 수 있는 내용으로 써서, 유머와 센스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유노협의 기획 취지를 소개했다.

실버 센류 응모작 심사를 위한 작업 장면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각종 행사나 즐길 거리가 급감한 시기에는 응모작이 쇄도했다. 2021년 3∼6월 실시한 21회 실버 센류 공모에는 1만6천621편이 몰려 최다 기록을 세웠다.

실버 센류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나이 제한이 없다. 작년에 실시한 23회 공모에는 11∼108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참가했다. 단골 응모자도 있고 여러 차례 입선한 응모자도 있다고 한다.

실버 센류를 다룬 책이 이웃 나라에서 인기를 끈다는 소식에 이들은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후쿠자와 계장은 "(한국에서) 책을 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주목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다 씨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실버 센류를 즐겁게 받아들인다는 것에 놀랐다"며 "늙는 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거기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만국 공통인 것 같다"이라고 반응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유노협 관계자

적을 때는 수천 편, 많을 때는 1만편을 훌쩍 넘는 작품을 심사하는 일을 쉽지 않다.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재미도 쏠쏠하다.

후쿠자와 계장은 "늙음을 테마로 하니 변하지 않는 것(주제)도 있지만 그해에 유행하는 것을 소재로 삼는 작품도 많다"며 시대의 변화를 새삼 느낄 수 있다고 귀띔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확산 초기인 2020년 상반기 공모 입선작을 보면 "텔레워크(원격 근무) 해보고 싶은데 나는 무직", "(우리 집 개는) 왜 짖어 마스크 쓴 주인에게" 등이 눈길을 끈다.

행복한 노후의 비결은 무엇일까. 후쿠자와 계장은 자발적인 결정을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책 표지 이미지

"아직 건강할 때 제2의 인생을 어떻게 할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우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내가 책임지고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이 됩니다. 유료노인홈에 입소하는 것도 스스로 결정해서 온 것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결정에 의해 입소한 것은 마음가짐이 다른 것 같아요."

이다씨는 "(은퇴한 후) 부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취미에 시간을 쏟고 좋아하는 것을 하며 활기 있게 지내는 분들이 많다"며 일상 속 즐거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sewonlee@yna.co.kr

ㅡ[연합뉴스]ㅡ202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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